현대그룹 초대회장 정주영의 명언
“이봐, 책임자, 해 보기나 했어?”의 당사자
현대그룹 초대 회장의 어록이다.
“길이 없으면 길을 찾아라, 찾아도 없다면 길을 만들어라.”

정주영 회장은
대한민국의 기업인, 정치인. 별칭은 왕회장. 현대그룹의 창업주이자 초대 회장으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1세대 기업인 중 한명이다.
파란만장한 근현대사에서 소학교 졸업이라는 학력을 극복하고 일어서서 현대그룹이라는 거대 기업을 일군 자수성가형의 신화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1930년대 쌀 배달부터 시작해 자동차 정비업, 건설업 등을 거치며 20세기 한국의 경제 성장을 이끈 인물이었으며 1990년대에는 정계에도 진출했지만 낙선한 후 1998년에는 소 떼를 이끌고 방북한 것을 계기로 금강산 관광 등을 유치한 대북 사업의 선구자로 활동하다 2001년에 사망하였다.
호는 '아산(峨山)'이다. 북한 강원도 지역에 있는 고향 마을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오늘날 울산광역시에는 그의 호를 딴 아산로가 있다.
1995년 미국 포브스 선정 세계 9위 부자에 등극하기도 했다.
정주영의 생애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 사이의 슬하 6남 1녀 중 첫째, 집안의 장남이자 장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호는 고향 마을 아산리의 이름을 딴 '아산(峨山)'. 현대그룹이 전국 곳곳에 세운 아산의료원도,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앞 태화강을 따라 동구와 북구를 연결하는 도로인 아산로 역시 바로 이 호를 딴 이름이다. 이것을 보고 충청남도 아산(牙山)시에서 온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충남 아산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송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학창시절 사진 즉,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다. 다만 이 초졸 학력은 약간의 오해가 있는데 당시는 초등 의무교육이 없고보통교육 개념도 희미할 때라 정주영이 초등학생일 때 보통학교 취학률은 채 20%도 안 되던 시절이었고, 2000년대 이후는 물론, 그래도 고등학교는 보내려고 했던 20세기 후반과도 괴리가 있다. 즉, 이를 고려하면 정주영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기준 상위 20% 정도의 교육은 받았던 셈이다. 최소한 비율만 따졌을 때 2022년 기준 고졸은 물론이거니와 어지간한 대학 학력과도 비견할 만한 수준이 된다. 현재 기준으로 초등학교 졸업이라고 해서 저학력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정주영의 학력이 자꾸 부각되는 것은 집안이 엄청 잘 사는 집안은 아니었고, 다른 많은 재벌가 총수보단 학력이 처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LG 구인회 회장의 경우 고등보통학교 3학년 중퇴라 오늘날 학제로는 중졸 정도에 상응하는 수준이고 무엇보다 집안이 이름높은 양반가였다. 또한 롯데 신격호 회장도 고등실업학교까지 다녔고, 한 세대 아래이긴 하지만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은 당대 최고 명문고였던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를 졸업했다. 특히 라이벌로 자주 비교되는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 천석꾼 집안에서 태어났다. 중퇴라지만 도일하여 와세다대학 정문을 밟아봤는데 이 시대 기준으로는 대학, 그것도 일본 대학이면 중퇴도 어마어마한 스펙이다. 당대 조선인 입장에서는 최상위권 스펙이라 할 수 있는 셈이다. 이런 이병철과 재계 1, 2위를 다투니 호사가들 사이에서 자연히 '초졸 대 대학중퇴' 식으로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된 것이다.
한편 정주영이 초등학교만 졸업한 반면 동생들의 학력은 좋은 편이다. 둘째 동생 정인영은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학을 중퇴, 넷째 동생 정세영은 고려대학교를, 막내 정상영은 동국대학교를 각각 졸업했다. 요절한 다섯째 동생 정신영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다가 퇴사 후 독일 함부르크 대학교에서 유학 중 장폐색으로 급사했다.
그의 아버지 정봉식은 장남인 정주영이 훌륭한 농사꾼이 되어 가족을 잘 부양하길 바라는 마음에, 그가 어린 나이 때부터 일을 쎄게 시켰던 것 같다.
청소년기 정주영은 점점 더 힘들어지는 농사일에 학을 떼 그만 집안의 돈을 훔쳐서 가출한 적도 여러 번 있는데, 한 번은 부친이 소를 판 70원을 갖고 가출했던 적도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함경북도 청진으로 갔다고 한다. 하지만 차비가 없어서 원산 근처의 고원군에 도착했다가 마침 그곳 탄광촌 근처에서 철도 공사가 한창이어서 막노동을 했다고 한다.
두 번째는 금강산이었으나 일도 못 구하고 사기만 당하고 아버지에 끌려왔다.
세 번째는 상기한 소를 판 돈 70원을 훔쳐서 서울로 가서 주산, 부기(경리업무)학원에 등록했으나 또 다시 아버지에게 잡혀 끌려왔다. 이때 아버지는 "대학을 나온 놈도 실업자가 되는 판국에 너 같은 조선놈이 올라간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 건 아니다. 게다가 넌 장남이고 농사를 지어야지." 라면서 타일렀다고 한다. 물론 오늘날 와서 보면 아버지의 말대로 했다면 지금의 현대도 없었겠지만 당시 시대상을 생각해 보면 일리가 없는 말도 아니었다.
네 번째는 소학교 친구 중에 부농의 아들이었던 오인보와 같이 가출했으나 또 끌려왔다. 이후 오인보는 나중에 '현대자동차공업사'의 창립멤버가 된다. 하나 이후 다시 가출해 인천 부둣가에서 막노동 일을 해 돈을 벌며 서울에 정착했다. 성북구 고려대학교 본관 공사장, 용산역 근처 풍전 엿 공장(현재의 오리온) 등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고 한다.
1930년대 신당동의 쌀가게 '복흥상회(福興商會)'에서 쌀 배달 점원으로 일하다가 당시 정주영을 눈여겨본 쌀가게 여주인이 성실하게 일해온 정주영에게 걍 니가 이 가게 사라고 가게를 매도하여 3년 뒤 쌀가게 '경일상회'를 차렸다는 사실은 유명한 일화이다.
정주영이 쌀가게를 인수하게 된 경위에 대해 주인집 외아들이 노름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내용이 정주영의 자서전에 등장하지만 중앙일보 기자 출신인 여주인의 장손에 따르면 이것은 사실이 아니며 아마 대필작가의 실수가 아닌가 생각된다고 하였다. 실제 주인집 외아들은 일본 주오대학를 졸업한 인텔리였으며 현대건설에서 근무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 후 일제가 쌀 배급제를 시행하면서 자연스레 문을 닫았다. 이후 현재의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 '아도 서비스'(ART SERVICE)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세워 직원이 80명에 달할 정도로 크게 운영하였다. 이 중에는 윤덕영, 당시 조선총독부 경무총장,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의 차도 있었다. 때문에 후일 아도 서비스에 불이 나 입고 됐던 차들이 모두 타 버렸을 때 정주영이 윤덕영의 자택인 벽수산장과 조선총독부에 직접 찾아다니며 차값을 갚겠으니 시간을 달라고 빌러다녔다고 한다. 박흥식은 자신을 찾아온 정주영에게 화신백화점이 전소됐다 재건했던 이야기와 사업상의 조언을 해주며 격려를 해 줬다고 한다. 그리고 박흥식은 오히려 화신백화점의 자동차는 모두 정주영의 공장으로 보내 수리하도록 배려했다.
아도 서비스 화재로 건물과 수리 중인 자동차들이 전소해 버리는 일이 발생했을 때 다행히 평소에 그의 행동을 눈여겨보았던 당시 후원인이 거금을 빌려줘 재기에 성공했다. 재기에 성공한 정주영은 자리를 동쪽으로 옮겨 신설동의 작은 공터에서 다시 자동차 정비소를 열게 된다. 여기에도 일화가 있는데 정주영이 쌀가게를 하면서 알게 된 후원인 오윤근은 사람 보는 눈이 좋아 돈을 빌려주고 떼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허나 처음 그에게 빌린 돈으로 세운 공장이 날아가자 정주영이 그를 찾아가 다시 돈을 빌려달라면서 "여기서 내게 빌려준 돈을 떼이면 당신 이력에 흠이 생기지만 다시 빌려주면 그 돈으로 재기해서 갚겠다."라고 했다. 이 말에 후원인도 자신이 돈을 떼인 적이 없다는 기록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돈을 빌려 줘야겠다고 하며 선뜻 빌려주었고 정주영은 약속대로 돈을 갚았다. 둘 다 보통내기는 아니었던 셈이다. 하지만 결국은 1943년 기업정리령으로 공장이 일진공작소에 합병되고, 트럭을 사 황해도의 홀동광산에서 진남포 제련소로의 운송업을 하다가 1945년 3월에 그만둔다. 덕분에 몇 달 뒤 소련군 포로로 시베리아에 끌려가는 일을 면한다. 이후에는 한동안 무직으로 돈암동에서 많은 가족과 거주했다고 한다.
미군정 말기인 1947년에는 서울에서 건설 회사를 차렸다. 지금 현대그룹의 토대가 되는 현대토건사이다. 당시 은행에서 큰 돈을 빌리는 사람들을 봤더니 건설업자가 많은 것을 보고 자동차 수리 공장 사장이 순식간에 건설사를 세운 것이다. 실행력 하난 뛰어났던 셈. 그리고 얼마 안가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이시기 주한미군 통역장교로 복무한 손아랫동생 정인영의 도움으로 주한 미군 관련 공사를 거의 싹쓸이하면서 창립 10년 만에 전국 10대 건설사로 성장한다.
회고록에 의하면 미군으로부터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한에 맞춰 한겨울에 UN묘지에 잔디 입히는 일을 발주 받았다고 하는데 당시 한국의 여건상 겨울에 잔디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다른 업체에서 전부 거절한 것을 정주영은 받아들였다. 일단 파란 풀로만 덮으면 된다는 확인을 받은 후 트럭 30여 대를 동원해서 밭에 나있는 보리 싹을 사다가 심어서 행사를 무사히 마쳤다고 한다. 이후 겨울이 지나자 보리를 전부 갈아엎고 다시 잔디를 심어 마무리했다. 이 일이 화제가 된 후 미군으로부터 많은 일을 발주 받았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정주영의 가장 큰 시련은 바로 전후에 수주했던 고령교 공사였다. 1935년에 처음 개통됐지만 6.25 전쟁 때 폭파되어 1953년부터 현대건설이 복구에 나섰지만 사실상 말만 복구 공사지 실제로는 신축 공사에 가까웠다. 당시 복구 비용은 5,478만 환(현재 약 547억 원)에 달했다. 더군다나 이는 당시 정부에서 발주한 공사 금액 중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금액이었다. 게다가 당시까지만 해도 큰 공사를 한 일이 전무한 데다가 건설 장비도 부족했고 애써 박은 교각은 급류에 휘말려 사라져 버리는 사고까지 일어난 데다가 물가도 자꾸 뛰어올라 인부들에게 줄 월급마저 줄어 인부들이 파업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정주영은 "사업하는 사람은 첫째도 신용, 둘째도 신용"이라 말하며 막대한 사채를 쓰고, 동생 정순영의 20평짜리 기와집과 매제 김영주의 20평짜리 집, 옛 자동차 수리 공장 자리까지 팔아가면서 그 모든 자금을 공사에 쏟아부어 1955년에 완공시켰으며 그렇게 점점 사업 규모를 확장하여 현대그룹을 만들어낸다.
이후 박정희 정부 때도 건설 수주를 따내는데 1960년대 후반 소양강댐을 건설할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안면을 튼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정 회장은 훗날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서 이때 댐 설계 변경 과정의 비화를 말했다. 당시 한일기본조약의 독립 축하금 명목으로 받은 보상금을 소양강댐 건설에 사용하였는데 최초 설계사인 '일본공영'이 유리한 설계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공사비를 착복할 의도가 있었으며 건설 사정에 밝지 않은 건설부가 이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콘크리트 댐 대신 사력식 댐을 주장했고 이게 실제 통과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안경모 당시 건설부장관은 정주영 회장의 주장은 '한 마디로 거짓말'이라며 현대건설은 사력댐 방식이 결정된 뒤 입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느 쪽 말이 맞는지는 오늘날엔 오리무중이다.
그런데 국토건설청장의 주장에 관한 근거 자료가 최근 발견되었다. https://blog.naver.com/parksgil/223416444233
당시 국토건설청 소속 토목기사가 1961년 2월 27일부터 1962년 3월 29일까지 호주에서 수력발전소 건설에 관한 기술연수와 댐 건설현장 실무훈련을 받았는데 소양강댐과 유사한 크기(높이 116m)의 사력댐인 유컴빈댐(Eucumbene Dam) 수력발전소였고 관련 내용을 1962년 5월 1일에 국토건설청장에게 보고하였고 당시 청장이 국장회의를 소집하여 관련 내용을 공유하였다. 당시에는 일본도 이런 큰 규모의 사력댐 건설 기술이 없었고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라 국토건설청, 현대 건설을 포함한 업계 모든 관련자들이 이 내용을 모르고 콘크리트댐 건설을 주장했었지만 이 보고를 계기로 국토건설청 내부에서 사력댐 건설이 검토되었다고 한다. 아래는 보고서 내용 중 사력댐 방식의 장점에 대해 기술한 내용이다.
"설계와 시공만 철저히 된다면 토암댐(사력댐)의 안전도가 결코 콘크리트댐에 뒤떨어지지 않음을 알 수 있었으며... 사력댐 구축에는 면밀한 축토관리가 필요할 것이나 그대신 막대한 양의 시멘트를 절약할 수 있으므로 현 국내 실정에 상응하리라고 봄."
이 외에도 사력댐 건설을 위한 계획, 조사, 수리모형시험, 각종 재료시험, 설계, 시공 관련해 습득한 자세한 방안이 기술되어 있다. 따라서 국토건설청 내부 검토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내와 일본에는 이런 대규모 사력댐 건설 기술이 없어 정부 부처에서 우여곡절 끝에 리스크를 안고 사력댐으로 결정하여 건설되었다.
1971년 정주영 회장은 미포만 해변 사진과 축척 지도,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를 들고 차관을 받기 위해서 유럽을 돌았다.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정주영 회장에게 조선소를 건립하라고 했고 난색을 표하던 정주영 회장은 조선소를 짓기 위해 여러 방법을 강구해 봤지만 이번만은 해결책이 없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자 박정희 전 대통령이 불같이 화를 내며 "무조건 해내라"고 했다고 한다. 결국 아래의 일화는 대통령의 성화로 대책 없이 해외를 싸돌아다니며 어떻게든 조선소 지을 돈을 빌리고자 했던 정주영 회장의 눈물겨운 스토리라고 볼 수도 있다.
정주영은 영국에서 바클리스 은행과 4,300만 달러 차관 도입을 협의했지만 은행의 최종 입장은 거절이었다. 그 뒤 정주영은 1971년 9월에 바클리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선박 컨설턴트 회사의 회장인 롱바텀을 찾아갔다. 롱바텀의 추천서가 있으면 영국의 은행에게 쉽게 투자를 유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유명한 거북선 이야기가 나온다. 정주영은 롱바텀에게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며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 앞서 철갑선을 만들었다"라며 우리는 할 수 있으니 믿어달라고 설득하여 추천서를 받아냈다. 그럼에도 바클리스 은행에서는 "배를 구매하겠다는 사람을 먼저 찾아와라. 배 주문서를 가져오면 차관을 빌려주겠다."라고 얘기했다. 정주영은 롱바텀에게 그리스의 선박왕 아리스토틀 오나시스의 처남인 리바노스가 값싼 배를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에게 26만 톤짜리 선박 수주 계약을 따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계약금에 이자를 얹어주고 배에 하자가 있으면 원금을 돌려준다는 파격적 조건이었다. 리바노스도 그의 말을 듣고 조선소도 없는 사람에게 일종의 도박을 건 것이다. 정주영은 그에 대해 "나보다도 미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한국 정부도 보증을 서줘서 바클리스 은행에서 차관을 빌렸고 정주영은 "우리가 지금 조선소는 없지만 배를 계약해 주면 그걸로 돈을 빌려 조선소를 지은 뒤 배를 만들어 주겠다."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을 실현한 것이었다.
오나시스 처남 레바노스한테 얘기를 했습니다. 사실 참 그, 지금 생각해도 한심한 얘기죠. 우리가 뭐 조선소가 있으면서 배를 팔겠다는 게 아니고, 그 5만 분지 1지도, 그 다음에는 그 조선소 짓겠다는 백사장 사진. 그걸 들고 가서 "당신이 배를 사 주면은..." 아주 얘기가 구구하고 길죠. (학생들의 작은 웃음소리) "배를 사 주면은 사 줬다는 증명을 가지고 영국 정부의 승인을 받아서, 영국 정부에서 차관을 얻어서 기계를 뭐... 사들이고 그래서 여기다 조선소를 지어서 네 배를 만들어 줄 테니까 사라." 이런 얘기죠. (학생들의 웃음소리) 근데 어떤 사람은 우릴 보고 엉터리냐, (라고 했지만) 우리보다도 더 형편없는지 그래도 그 사람이 턱 걸려들었습니다. (학생들의 웃음소리)
정주영이 1986년 중앙대학교 강연에서 당시를 회상한 내용
그 뒤 정주영은 1972년에 울산 조선소 건설에 들어갔다. 조선소 건설 과정에서도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자서전에서는 비가 세차게 내리던 어느 날 밤에 차를 타고 현장으로 가다가 길에 쌓인 자재 더미를 피하려다가 차가 전복되어 바다에 빠져 하마터면 익사할 뻔한 사건을 당했다고 한다. 다행히 차에서 금방 빠져나왔고 현장에 있던 직원들의 신속한 구조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길에 방치한 자재 때문에 물에 빠진 사람이 다름 아닌 회장이었다는 사실을 안 직원들은 모가지가 날아갈 생각에 벌벌 떨었다고. 하지만 정주영은 되려 물이 참 시원하다고 농담을 던지며 그 직원들에게 포상을 내렸다고 한다. 울산 조선소에서 진수하는 첫 호선도 정회장이 직접 지휘를 했다고 하는데 당시 국내에 내로라 하는 선장들도 이는 불가능한 일이라 여겨서 선뜻 시운전을 안 맡으려고 해서 본인이 직접 나섰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소의 완공과 함께 유조선이 건조되어 나오는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는데 도크가 부분 완공되면 그 자리에 바로 철판을 대어 배를 만들어나가는 방식으로 하여 도크와 배를 동시에 만든 것이다.
서산 간척지 공사 당시 특유의 뻘 지형으로 인해 매립이 잘 안 되자 큰 폐유조선 두 척을 착저시켜 둑으로 이용해 매립 공사를 한 후 폐선을 분해해 판매한 정주영식 공법으로 유명하다. 이 공법은 나중에 서해에서 조수간만으로 인해 방조제 막바지 공사가 지연되었을 때나 홍수 시 긴급 제방을 만들 때 등으로 응용되었다.
알파 엔진을 개발할 때의 일화도 유명한데 미쓰비시의 구보 회장이 로얄티 반값 할인을 조건으로 연구소를 닫으라고 요청했을 때 성공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밀어붙여 결국 대한민국 최초의 독자 개발 엔진인 알파 엔진이 탄생했다. 이런 조건을 내거는 걸 보니 분명히 해 볼 만한 일이라 생각했다고 후일 밝힌 바 있다.
당시는 석유 파동으로 인해 중동에 돈이 엄청나게 몰린 상태였다. 그래서 한국의 건설사들은 과감하게 중동 시장에 진출했는데 그 선두에는 현대건설이 있었다. 타국 건설사들이 합리적으로 100만 달러를 입찰하면 현대건설은 절반도 안 되는 40만, 30만 달러를 적어내는 식으로 공사들을 따냈다. 결과물도 선진국의 건설사들과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공사를 맡게 되었고 이 오일머니는 대한민국의 경제를 크게 도약시켰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산업항 공사는 수주 금액이 당시 대한민국 정부 전체 예산의 25%에 달할 정도로 대형 공사였다. 정주영은 공사비를 아끼고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한국에서 모든 기자재를 마련해 바지선에 실어서 주베일까지 옮기기로 결정했다. 쉽게 생각하면 커다란 뗏목에 기자재들을 나누어 담고 앞에서 큰 배가 끌면서 12,000km를 달려갔다고 생각하면 된다. 태풍이 자주 부는 필리핀 해협, 인도양, 걸프만 등에서 얼마든지 난파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천운으로 이 계획이 잘 실행되었다. 일이 잘못 되었으면 현대그룹은 없었을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자동차 산업 진출, 조선소 건설, 주베일산업항 건설 등 정주영 회장은 사운을 걸고 이루어 낸 일들이 많다. 군사정권의 의뢰를 받은 것도 있었지만 반대로 말하면 정주영이 그만큼 일을 잘했다는 소리기도 하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유치한 일등 공신으로도 유명하다. 1980년대 전두환 정부는 올림픽 유치 의지는 있었으나 돈이 너무 많이 들고 당시 경쟁 도시가 경쟁하기 힘들 것이라고 판단한 일본의 나고야라 거의 포기 상태였는데, 이에 정부 관계자들도 나중에 본인들이 책임을 뒤집어쓸까 봐 적극적으로 나서길 꺼려서 당시 88 올림픽 유치 위원회 위원장이자 전경련 회장이던 정주영이 유치의 최전선에 서서 싸웠는데 이때 나고야 올림픽 유치 위원회에서는 비싼 시계를 IOC 위원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며 유치 홍보를 했다. 이에 정주영은 IOC 위원들이 머무는 숙소에 꽃바구니만을 돌리면서 홍보를 했다. 승산이 없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막상 다음날 리셉션에서 각국 IOC 위원들은 시계보다 꽃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 측 유치단에 관심을 보여서 일본 측이 당황했다고 한다. 이렇게 정주영은 물량보다는 성의로써 친밀해지자며 과감히 밀어붙였고, 결국 최종 투표에서는 서울이 나고야를 52-27로 누르고 1988년 하계 올림픽을 유치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1987년, 동생 정세영에게 현대그룹 회장직을 물려주고 정주영 본인은 명예회장으로 사실상 경영에서 한발 물러난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참조
정주영
파일:아산 선생.png "이봐, 채금자(책임자). 해 보기나 했어?" 이론적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섣불리 포기하려 들
namu.wiki
정주영 어록
이봐, 채금자(책임자). 해 보기나 했어?
사업은 망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인간은 한번 신용을 잃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다하는 최선.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스스로 운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은 나쁜 운이란 없다.
길이 없으면 길을 찾아야 하며 찾아도 없으면 길을 닦아 나아가야 한다.
무슨 일을 시작하든 된다는 확신 90%와 반드시 되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 10% 외에 안될 수도 있다는 불안은 단 1%도 갖지 않는다.
머리는 쓰라고 얹어 놓고 있는 것이다.
"적당히"의 그물 사이로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빠져 나가게 하는 것처럼 우매한 것은 없다.
고정관념이 사람을 멍청이로 만든다.
우리가 뒤떨어져 있는 분야라고 해서 주저한다든지, 미지의 분야라고 두려워한다든지, 힘들다고 피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패배주의이다.
모든 일의 성패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사고와 자세에 달려 있다.
목표에 대한 신념이 투철하고 이에 상응한 노력만 쏟아 부으면 그 누구라도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다.
나는 재벌이란 표현이 싫다. 나는 그저 꽤 부유한 노동자일 뿐이며 노동으로 재화를 생산해 내는 사람일 뿐이다.
건설업은 즉각적인 결정이 중요하다. 시간이 곧 돈이기 때문이다. 무리한 결정이라 할지라도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나는 결정에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내 이름을 걸고 일하는 한 내 권한을 양보도 안 하는 대신 다른 이에게 책임 전가도 안한다.
농업은 세계의 산업 형태가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든 절대로 소홀히 해서도, 포기해서도 안되는 우리 인간의 필수 자산이다.
우리가 먹는 식량만큼은 어쨌든 우리 스스로 자급자족할 수 있어야 한다.
국민의 고혈을 짜내 호화장엄한 사치의 극을 이루었으니 혁명은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제왕이 자초한 것이었다.
사람은 의식주를 얼마나 잘 갖추고 누리며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좋은 영향을 얼마나 미치면서 사느냐가 중요하다.
위대한 사회는 평등 의식 위에 세워진다.
10배로 일하는 사람이 10배는 피곤해야 맞는 이치인데 피곤해하고 권태로워하는 것은 오히려 게으름으로 허송세월하는 이들인 것을 보면 인간은 일을 해야 하고 일이야말로 신이 주신 축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기 자신이 열심히 절약하고 모으면 우선 큰 부자는 못 되어도 작은 부자는 될 수 있다.
돈만을 목적으로 한 고리대금이라든지, 은행 이자만 타 먹으면서 재산을 불린다든지 하는 것은 진정한 자본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악성 자본주의이다.
지식은 쟁탈해서 분배할 수 없다. 하지만 재물은 쟁탈할 수 있다.
운이란 때라고 생각한다. 확실히 좋은 때 나쁜 때는 있다. 그러나 좋은 때라고 해서 손 놓고 놀아도 마당으로 호박이 혼자 굴러들어와 주는 것은 아니며 나쁜 때라고 해서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는데 더 나쁜 결과를 맞게 되는 것은 아니다.
부지런하게 노력하는 사람은 좋은 때도 놓치지 않고 잘 잡아 쓰며 나쁜 때는 더 더욱 부지런히 노력해 수습하면서 비켜가기 때문에 나쁜 운이 크게 작용을 못한다. 반대로 게으르며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좋은 때가 와도 손이 늦어 붙잡지 못해 좋은 때를 나쁜 때로 만들고 나쁜 때는 운 탓만 하며 좌절 속에 허우적거리기 때문에 항상 불운의 연속으로 일생을 보내는 것이다.
나는 젊을 때부터 새벽 일찍 일어난다. 그 날 할 일에 대한 기대와 흥분 때문에 마음이 설레어 늦도록 자리에 누워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밤에는 항상 숙면할 준비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새 날이 왔을 때 가뿐한 몸과 마음으로 즐겁고 힘차게 일을 하기 위해서이다.
존경하고 인정할 점이 없다면 사랑할 수도 없다.
여유가 없으면 창의가 죽는다. 나는 경험으로 그걸 체득한 사람이다.
폭 넓은 인간 교류는 나에게 유머를 잃지 않게 하고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고 인생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고 공감대를 확대시키고 그들의 정서를 흡수함으로써 사람이 빠지기 쉬운 사고의 경직을 방지해 준다.
우리가 잘 되는 것이 나라가 잘 되는 것이며, 나라가 잘 되는 것이 우리가 잘 될 수 있는 길이다.
성공신화를 이룬 정주영 회장의
일화로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