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골을 못 넣은 이를 책망하지 않는다.
다만 노골이 두려워서
슈팅조차 하지 않는 자를 책망한다.
- 거스 히딩크 -
유럽 축구 역사상 단 9명밖에 없는 트레블을 달성한 감독으로, 클럽팀과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모두 성공적인 커리어를 남겼다. 주요 성과로는 에인트호번의 1987-88 시즌 유러피언컵 우승과 트레블, 그리고 에레디비시 6회 우승, 첼시의 2008-09 시즌 FA컵 우승, 네덜란드의 월드컵 4위, 대한민국의 2002 월드컵 4위, 호주의 2006 월드컵 16강, 러시아의 유로 2008 4강이 있다.
2021년 9월 10일, 공식적으로 감독 은퇴를 발표함으로써 지도자를 포함한 54년간의 축구인 경력을 완전히 마감했다.
히딩크는 처음부터 프로선수가 되고자 다른 선수들처럼 유스팀에 입단해서 프로선수가 된 것이 아니라 네덜란드 스포츠 전문대학(CIOS)에 입학하여 지도자를 목표로 했다고 한다. CIOS 졸업 후 2급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 더 흐라프스합의 코치로 부임했지만 나이도 스물이고 기량도 괜찮았기 때문에 감독이 선수 겸 코치로 활동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의를 해 곧바로 수락했다고 한다. 포지션은 중앙 미드필더.
1960년대 당시, 에레디비시는 AFC 아약스나 PSV 에인트호번같은 강팀을 제외하곤 급료도 부족한 편이어서 선수들 대부분이 오전에 일하고 오후에 훈련하는 투잡을 뛰었다고 하는데 히딩크는 코치직을 겸임하고 있었으므로, 오전에 유소년을 지도하고 오후에 팀 훈련에 참가했다고 한다. 더불어 야간에 체육 전문대학에 입학하여, 체육교사 준비도 같이 했다고. 3시즌 동안 데 그랴프샤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자 PSV로 이적하였는데 주전 경쟁이 심하여 제대로 출전하지도 못했다. 다시 데 그랴프샤프로 이적했고, 후에 네이메헌으로 이적했다.
네이메헌 시절에는 체육교사와 선수를 겸임했는데 특수학교에서 장애아들을 지도하면서 얻은 경험이 훗날 감독 생활을 할 때 많은 도움이 됐다고 한다. 네이메헌 시절에는 시즌 종료 후 즉, 5월부터 다음 시즌이 시작되는 9월 즈음까지 미국에 잠시 임대되어 미국리그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당시 룸메이트가 조지 베스트였다고 한다. 네이메헌에서 은퇴 후 다시 더 흐라프스합으로 돌아와 코치 생활을 시작했지만 선수가 부족한 탓에 감독의 부탁으로 1시즌 더 선수생활을 하게 됐다. 포지션은 리베로였지만 1981/82 시즌을 끝으로 완전하게 은퇴한다.
FIFA 월드컵 4위라는, 대한민국 축구 역사에서 과연 이런 일이 다시 있을까 의문스러울 정도의 대업을 만들어준 지도자인 만큼 한국에서 그의 위상은 가히 神급이다.
당연하게도 KFA 명예의 전당 최초의 7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으며, 22년이 지난 지금도 '히딩크'라는 이름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고 보면 된다. 어느 정도냐면 2002년 이후 4번의 월드컵이 지나간 후인 2018년 겨울에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겠다고 한국에 조용히 들어왔는데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와 사진 촬영을 요청해서 일정에 차질이 빚어질 정도였다. 당시 동행했던 네덜란드 TV 방송분을 보면 히딩크 본인도 2년쯤 지나면 잊힐 거라 생각했지만 한국에 올 때마다 사람들이 많이 다가온다는 말을 하며 빠르게 사진 요청에 응한다.
이렇듯 한국에서 사실상 영원한 영웅 대접을 받는데 대한 반작용인지 일본에서는 히딩크 감독의 안티가 많다. 히딩크 본인의 말에 따르면 월드컵이 끝나고 나서 일본에서 자신에게 거액을 제시했지만 한국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내가 일본 감독이 될 수는 없다' 고 거절하기도 했고 게다가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호주 축구 국가대표팀을 맡아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을 박살냈으니, 싫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가 탈세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자 2ch 등지에서는 축제 분위기였다가 오래가지 않아 풀려나자 도로 실망했던 적도 있다.
물론 처음부터 이런 평가를 받은건 아니었고, 한국에서도 처음에는 그의 별명이 '오대영'이었을 정도로, '외국인 감독 하나가 굴러들어와선 개최국 망신 다 시키겠다'고 어마어마한 비난에 시달려야만 했었다. 그러나 히딩크는 월드컵에서 우리는 분명 세계를 놀라게 할 것이다. 모든 것은 그 때에 알게 될 것이라며 준비과정에서 흘러나오는 어떠한 비판도 수용할 것이라 하여 더더욱 언론을 벙찌게 만들었다. 거기다 언론이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비판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때도 자신은 6월을 기다려 왔고 세계 유명 축구팀들이 비웃어도 반박할 필요 없이 월드컵에서 보여주면 된다며 무한한 자신감을 표출했다.
특히 "개최국으로서 2라운드 16강만 넘으면 체면치레 하는 거다."라며 대부분의 여론이 히딩크에게 16강 진출을 두고두고 강조할 때도 "한국 국민들이 원하는 16강은 나의 바람이 아니다. 내게는 그 이상의 바람이 있다."며 야망을 드러내었다. 당시엔 '32강 조별리그나 통과하고 그런 말을 해라'는 반응이 많았지만 정말로 16강을 통과하고, 이후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라는 초절정 명언과 그에 걸맞은 성적까지 겹쳐지자 꿈을 현실로 만든 남자라면서 한국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등극했다.
감독으로서 히딩크가 평가한 한국 축구의 문제점은 공격수는 많으나 수비수의 자원이 부족한 것, 그리고 정신력이었다고 한다. 훈련 중에도 전술적, 기술적 실수는 문제 삼지 않았으나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선수가 가장 싫다며 선수들의 정신력에 많은 비판과 조율을 요구했다. 놀랍게도 이러한 지적은 2010년대~2020년대의 한국 축구에도 어느 정도 들어맞는 편이다.
한국 선수들이 기술은 유럽보다 부족하지만 붉은 전사 투혼만은 살아있다라고 생각했던 세간의 평가와는 정반대되던 셈. 그는 한국 축구의 기술이 유럽에 비교해서도 훌륭한 수준이라고 평가했으며 특히 양발잡이들이 많다는 점을 놀라워 했다고 한다.
유럽 축구에 대해 무지했던 당시에는 언론플레이성 발언이라는 의견도 있었고 확실히 EPL 라리가 세리에등 최상위 리그들에는 비비기 힘들었으나 주전급 선수들은 유럽 중상위권 리그에서는 통용 되는 실력을 보이며 이를 증명하였다.[8]
2002WC 멤버들의 90분 내내 사냥개처럼 뛰어다니던 체력과 탄탄한 기본기들만 보던 축구팬들은 이들이 은퇴 한 이후 국가대표에 뽑히고도 체력, 기술적으로 문제를 보이는 선수들이 속출하며 히딩크의 저런 발언들이 립서비스처럼 보이게 만든 원흉이 되었다. 히딩크는 상술했듯 오히려 멘탈적인 면을 크게 지적하며 한국 선수들의 승리에 대한 의지는 제법 높게 평가했지만 그마저도 독일이나 이탈리아가 보여주는 그 무시무시한 승부 근성에 비교해보면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특히 히딩크가 가장 혹평했던 것은 한국 선수들이 공만 잡으면 지나치게 흥분하여 오히려 골 결정력에 방해가 되는 것과 어린 선수들이 고참 선수들을 무서워 해 기가 눌려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한국 특유의 선후배간 위계질서를 가장 좋지 않게 보면서 "그라운드에서는 반드시 나이를 막론하고 반말을 쓰고 위계질서에 관계없이 서로간에 대화를 하며 경기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며 모든 선수들이 훈련 중 반말을 쓰게 하고 존댓말을 쓰는 사람은 월드컵 안 데려가겠다고 으름장을 놨다고 한다.
히딩크는 이런 수직적 관계가 축구의 창의성을 말살한다고 보았고 선배가 잘못을 하면 후배라도 반드시 지적하고 수정하라는 철학을 강조했다. 당시 몇몇 고참 선수들은 한국의 유교적 정서에 대한 이해 부족이라고 혹평했으나 지금에 와서는 대부분의 경우 대표팀과 축구계에 존재하는 위계질서나 권위의식을 타파하기 위한 신선한 시도였고, 결과적으로 20대 초반의 이천수, 박지성 등의 선수들이 기죽지 않고 활약하는데 도움이 된 것 같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더불어 수비수 자원의 부족 및 유소년 발굴 시스템의 안일함 등 제 3자인 외국인 감독의 시각에서 한국 축구 및 국가 대표팀의 문제점에 대해 냉철하게 분석, 지적했다는 점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 외에도 기존에 주목받지 못하던 선수들을 기용 및 발굴해 호평을 받았는데, 미리 선발된 선수 외에 선발되지 못한 쪽에도 더 좋은 선수가 많을테니 잔뜩 추천하고 계속 뒤져보라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해외에서 잘 나가던 선수들보다, 한국에 오래 머물고 있어 경기력이 다듬어져 있던 국내 선수들의 체력 등을 더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이 당시에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깨고 스타 선수였던 이동국은 탈락한 반면에 신참에다 당시 아무런 기대도 받지 못하던 박지성이 최종 엔트리에 합류하여 한일월드컵의 또 다른 스타가 된다. 박지성 본인에겐 히딩크가 축구인생의 은인이었던 셈이다.
아무튼 2002년 한일 월드컵으로 히딩크는 내리막길 감독이라는 평가에서 벗어났고 대한민국 내에선 국민영웅 대접을 받았다. 월드컵 시작하기 전에 오대영 감독이라고 그렇게 까대던 국내 언론들도 그를 거의 한국 축구의 성자로 떠받들며 매일 같이 찬양 일색이었다. 혹자는 만약 독일을 이기고 결승에 진출하거나 우승까지 했다면 국내에서 더 큰 폭발이 되었을 것이고 히딩크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면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외국인 대통령이 되고도 남았을 거라고 하기도 했다.
2002 한일 월드컵은 홍명보 등 고참들이 안정적인 기량을 보이고 이영표, 박지성 등 히딩크 부임 이전 발탁된 신예들의 활약도 돋보여 4강 진출이란 성과를 이룩한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의 리즈 시절이었다. 동시에 히딩크 본인에게도 전성기이자 인생역전 그 자체였다 할 수 있다. 이런 4강 신화의 업적을 인정받아, 히딩크 감독은 2003년 2월 25일 취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취임식에 문화·체육·학술 인사로 초청받아 참석하기도 했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2002년 당시 각종 광고에 모델로 출연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그의 이름을 딴 히딩크 음료가 나오기도 했었다. 김국진, 핑클 등에 이어 사람 이름이 상품명에 붙은 케이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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