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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샤넬 명언

Mindset

by Reading a Brand 2025. 5. 17.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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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XURY BEGINS WHERE NECESSITY ENDS.”
럭셔리는 필요가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COCO CHANEL-


Coco Chanel에 대해

본명은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Gabrielle Bonheur Chanel). 메종 샤넬의 설립자다. 세계 패션 역사, 특히 여성복과 실용성이라는 부분에 한 획을 그은 패션 디자이너다.

그녀는 여성복에 대한 유럽의 전통, 코르셋을 많이 이용하던 1900년대~1910년대의 여성복에 대해 왜 여자들은 비실용적인, 쓸모없는 복장을 고수해야 하는지 회의를 느껴 당시 애인이던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고향 영국에서 남성용 정장의 소재를 여성에게 적용하여 현대적 여성복 샤넬 수트로 간단하고 입기 편한 옷을 모토로 하는 디자인 활동을 시작하여 답답한 속옷이나 장식성이 많은 옷으로부터 여성을 해방하는 실마리를 만들었다. 그야말로 현대 여성복의 시초.

이에 대한 설로는 자유분방한 성격 탓에 상류층의 권유로 승마를 시작했는데 승마에서 여성들은 치마를 입거나 다리를 묶어버려서 사실상 걸쳐 앉는 벤치나 다름 없었으며 말을 바지를 입고 탈 수 없었고 바지를 입고 승마를 시작한 샤넬을 향해 사람들은 '정신이상자'라며 차별했기 때문에 그녀가 '입기 편한 옷'을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장식이 생략된 옷의 본체에 브레드나 코드의 테두리를 붙이고 당시에는 보기 드문 크고 작은 색유리나 크리스털 글라스의 액세서리를 붙이기도 하였다. 간단하고 입기 편하며 활동적이고 여성미가 넘치는 샤넬 스타일은 유행의 변천 속에서도 별로 변함없이 오늘날에도 애용된다.


그녀가 선택한 향수인 샤넬 No.5도 유명하다. 마릴린 먼로가 생전에 자기는 이것만 입고(뿌리고) 잔다고 해서 더 유명해졌다.


샤넬의 생애

샤넬의 어린시절


1883년 8월 19일 프랑스의 소뮈르에서 출생하였다.
가난에 시달리던 집안에서는 어린 그녀를 수녀원의 고아원에 맡겼는데 그녀는 불행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현대 여성복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자 연인들에게 둘러싸여 독립적이면서도 창조적인 삶을 살아간 여인이 되었다.

단순히 여성들의 패션을 바꾼 대단한 사람 수준으로 서술되었으나 12남매와 아내 잔 보뇌르를 두고 외가에서 받은 돈을 유흥가에서 흥청망청 날려먹고 가족을 버린 아버지 때문에 유년기를 수녀원에 버려진 채 보냈고 성인이 된 후에도 자존심이 강하여 평생 남자들에게 도움받기를 매춘에 비유하여 꺼렸으며 패션, 에티엔의 여자들에게 모자를 만들어 주기 전에는 노래와 춤, 승마를 익히는 등 패션의 대모 이전에 대하 소설을 연상케 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 사람이기도 했다.


샤넬의 디자이너 시절


1913년에 드뷜에 2호점을 개설한 그녀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인 1915년에 <메종 드 꾸뛰르>를 오픈했다. 1916년 콜렉션을 발표해 대성공을 거둔 그녀는 새로운 디자인과 소재로 화제가 되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아서 카펠과 얼마 동안 동거했던 그녀는 1919년에 카펠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다시 혼자가 되었다.

1921년 그녀는 파리 깡봉가 27, 29, 31번지 전체를 자신의 매장으로 채웠다. 본점을 깡봉가 31번지로 확장한 그녀는 조향사 에른스트 보와 함께 샤넬의 첫 향수인 <No.5>, <No. 22>를 발표했다.


이때 극작가였던 장 콕토, 화가인 피카소, 작곡가인 스트라빈스키 등이 주최한 살롱에 출연한 그녀는 사교계의 거물이 되었다.
당시 이름을 떨치고 있던 여성 화가였던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이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녀는 로랑생의 부드럽고 몽환적인 화풍으로 묘사된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인지 인수를 거부하고 수정을 요구했다고 한다. 로랑생 쪽에서도 자존심이 상했는지 수정을 거부하고 샤넬을 촌x이라고 디스한 것은 덤 그대로 그림을 자신의 집에 보관했는데 로랑생 사후 초상화는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넘어가서 전시 중이다.

1924년 이후 6년간 교제하던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보석 애호 취미로부터 영향을 받아 모조 보석을 사용한 쥬얼리를 발표했다. 원래 그녀는 편한 옷을 위한 실용주의자였기 때문에 과한 보석과 장신구를 싫어해서 '목에 거는 수표'라며 비아냥댔지만 진주를 발견한 뒤 인조진주를 섞어 패션의 일부, 악세사리의 일부로 편입시켰다. 이전까진 '부모가 물려준 보석'이나 '남편이 준 과한 보석'을 목에 걸었는데 여성이 주도적으로 목걸이를 패션 아이템으로 선택할 수 있게 되었으며 무게도 훨씬 가벼워졌다.

이때 샤넬 슈트도 발표해 1934년부터 양산되기 시작했다.
이후 그녀는 공작과 헤어져 여러 디자이너 및 유력자들과 사귀었는데 그녀와 사귄 남자들은 모두 급사하거나 파산했다.

1934년에 기업으로서 순탄한 성장을 한 샤넬 브랜드는 액세서리 부문의 공장도 개설했으며 이듬해엔 양장 전문점도 오픈했다. 1939년엔 약 4천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했으나 노동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노동조건에 항의한 노동자들이 파업 투쟁을 벌였다. 요즘과 비교해 가혹했던 노동 조건이었던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사회적 기준으로도 처우가 가혹해서 벌어진 일인데 코코 샤넬은 이에 충격을 받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향상시키는 대신 직장을 폐쇄하고 노동자들을 모두 해고해 버리고 일부 점포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사업을 접기로 하면서 일시적으로 은퇴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15년간 프랑스의 패션계를 떠났다. 그 때 코코 샤넬은 샤넬 향수라인에만 집중했는데 이는 연락이 닿는 유일한 가족 때문이었다.

코코 샤넬은 3남 3녀 중 첫째였는데 그리도 싫어하는 아빠는 외도를 일삼았고 엄마와 만날 때마다 강제로 임신을 시켜 자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했다. 결국 코코 샤넬의 엄마는 어린 나이에 사망했고 아이들은 수도원에 맡겨졌다. 이 때 남은 자매들과 형제들 중 연락이 유일하게 닿던 형제가 있었는데 그가 죽으면서 30년간 코코 샤넬은 조카의 후견인을 해줬다. 그런데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향수 라인만 남긴 채 조카가 있는 곳으로 피신을 간 순간 조카의 연락이 닿지 않았고 프랑스군으로 징집된 것이 아니라 나치독일군에 의해 포로로 잡혔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더군다나 포로로 잡히기 직전 결핵에 걸려 생사를 오가는 위독한 상태였고 코코 샤넬은 자신의 뮤즈이자 유일하게 진심으로 사랑했던 남자 '보이 드 샤넬'의 카펠이 사망한 트라우마로 인해 어떻게든 조카를 살리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그 조카는 자살한 여동생의 아들로 알려져 있고 코코 샤넬은 제 자식처럼 여겼으며 나중에는 그 자살한 여동생의 딸까지 거두었다. 코코 샤넬의 종손녀이자 대녀(goddaughter)인 이 아이의 이름도 가브리엘이다.

프랑스 사교계를 총동원해서 독일에 아는 연줄을 찾기 시작했고 이 때 조카를 풀어주기 위하여 독일에 방문해 결국 어떠한 조건을 수락하고 그 조카를 풀려나게 했다. 그 조카는 프랑스군으로 징집된 상황에서 나치 독일에 포로로 잡혀 있었으니 이를 풀어주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 그녀를 프랑스인들이 좋게 볼 리가 만무했다. 이후 프랑스에 돌아왔을 땐 히틀러의 부하와 연애했다는 사실이 프랑스 언론에 오르내렸고 코코 샤넬은 반 강제로 칩거하게 되었다. 40이 넘는 나이에 아이를 낳고 싶어 수 차례 시도했음에도 실패했던 그녀에게는 유일한 자식이나 다름 없었다. 덕분에 코코 샤넬의 조카는 1981년 사망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크리스티앙 디오르로 대표되는 남성 디자이너들이 화려하고 사치스런 디자인으로 패션계를 장악한 모습을 비판하며 다시금 자신의 실용주의 철학을 내세우며 패션계에 복귀하겠다는 생각을 품고 예전 동업자였던 피에르 베르트하이머의 자금과 사업 지원을 받아 드디어 1954년에 샤넬 컬렉션을 다시 선보이며 패션계에 돌아왔지만 프랑스 언론들은 진부하고 고루하다며 그녀의 컬렉션에 혹평을 쏟아 실패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반대로 '패션의 혁명'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할리우드의 스타들도 그녀의 옷들을 애용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패션은 다시금 유행의 중심이 되었으며 그녀도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고 트위드라는 현재까지도 사랑받는 패션을 미국에서 유행시켰다.

이 역시 사실 불편한 사실이 숨어 있는데 미국은 그녀의 옷을 가장 많이 헐값에 복제해 간 전과가 있었다. 무단으로 디자인을 도용해 3~6달러의 헐값에 팔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바지를 착용하지 못하게 했던 상류층들의 4년간의 괴롭힘을 알았기 때문에 미국 여성들의 '편안한 옷'을 위해 저작권 소송 등을 일체 포기하고 여성의 자유로운 의복을 위하여 아예 신문에 대놓고 헐값에 카피 옷을 광고하는 것도 눈감아주고 40년대 후반 미국 여성들의 사회 진출로 샤넬의 옷을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아예 샤넬 옷 따라 만들기 키트까지 집집마다 팔았다고 한다. 당시 잡지를 보면 미국에서도 샤넬이 있는 집과 없는 집으로 나뉘었고 집집마다 옷을 따라서 만들어 입으면서 샤넬 덕분에 미국에서 여성들이 직업을 가질 때 '편한 복장'을 입을 수 있었다.

1971년에 갑작스레 사망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는 가슴이 답답하다며 문을 열라고 가정부에게 말하고 침대에 누웠는데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그녀가 나치 부역 혐의에 대해 제대로 된 전범 재판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국 땅에 묻히는 것을 불허했고 결국 그녀는 망명지였던 스위스 로잔에 묻히면서 죽어서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샤넬 명언 모음
1. My friends, there are no friends.
Mes amis, il n’y a pas d’amis au monde.
내 친구들이여, 세상에 친구란 없다네.

2. 타인을 외모로 판단하지 마라.
하지만 당신은 외모로 판단될 것이다.

3. 패션은 변하지만 스타일은 남는다.

4. 모든 여성들에게 아름다움을.

그리고 오늘의 명언

“LUXURY BEGINS WHERE NECESSITY ENDS.”
럭셔리는 필요가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COCO CHANEL-

가난하고 힘든 가정환경, 여성에게 불공평한 패션을 바꿔버린 용감한 코코샤넬의 이야기를 보는 모든 이들에게 좋은 하루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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